PC 로스, KPC 보시
부끄럽지만 우리 홍로스의 캐해가 일품, 최고급 그 자체이기에 공개로 돌려둡니다
어느 가을.
파티에 참석한 당신은 연회장 구석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합니다.
Ross:
지능
기준치: |
70/35/14 |
굴림: |
22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 이상하게도 그를 보는데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증오도, 원망도 없이 평온하기만 합니다.
그 부분만 도려낸 것처럼.
Bosie:하하, 내 안부를 다 궁금해해주고. 잘 지냈죠...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이지만, 더 말하진 않는다.)
Ross:(안부를 묻는 게 이상한가? 보통의 사이라면 다들 이런 식으로 인사하곤 하지 않나?) 무슨 문제라도.
Bosie:아뇨, 얼굴이 좋아 보이길래. 일행은 없나봐요?
Ross:나야 늘 ... 혼자지. ...당신도 혼자인 것 같은데?
Bosie:(입술을 끌어올린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긴 하죠. 저기에. 당신이 보이길래 와봤어요.
Ross:일행? (보시가 이야기한 쪽을 힐끗 바라보다가 다시 보시와 눈을 맞추며) 그럼 나와 계속 시간을 보내기는 곤란하겠군.
Bosie:떠나주길 바라는 것처럼 들리네. (키득거리며 좋을 대로 해석하고는 인사한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Ross:(배려해주는 말마저 지레 자기에게 상처가 되게 이해해버리다니.. 이런 점마저 제멋대로군) 나도 만나서 반가웠네.
더글라스가 향한 쪽을 보면, 몇 명의 무리가 보입니다.
Ross:
관찰력
기준치: |
85/42/17 |
굴림: |
51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퀸즈베리의 이름 앞에서는 얼마든지 혐오감을 감추고 친한 행세를 할 수 있는 자들이죠.
더글라스와 그들은 꽤나 친밀해 보입니다.
런던을 뒤집었던 스캔들은 일어난 적도 없던 것처럼.
파티장에 더 용무가 남았나요?
Ross:(불현듯 외롭다. 즐겁게 파티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과 다른 공간에 서 있는 듯한 느낌. 저곳에 섞여들지 못할 것 같은 기분. ...파티장을 나선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와 음악을 뒤로 하고 파티장을 나옵니다.
집에 돌아가니 사용인이 소포를 하나 건넵니다.
그러고 보니 출판사에서 제본한 책을 먼저 한 권 보내준다고 했습니다.
Ross:
지능
기준치: |
70/35/14 |
굴림: |
49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인쇄가 잘 됐군, 하는 생각 외에 아무 감흥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것들이 모두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의 얼굴을 떠올려도 더 이상 슬프지 않다는 것을.
Ross:(편지들을 읽어내려가다 파티장에서 즐겁게 떠들던 보시를 떠올린다. 보시. 분명 웃고 있었지. 그러나 편지에서 불리는 이름의 주인은 아주 모진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자신의 일처럼 느껴지던 그의 일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자 ...보시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보시에게도 사정이 있었던 걸까)
(더는 슬프지 않다. 그를 떠올려도 괴롭지 않다. 슬픔에 사로잡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을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확인 후 회신해달라는 짧은 메모가 동봉되어 있습니다.
책상 위에 언제 왔는지 모를 편지 한 통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 당신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면, 일곱 개의 옷을 입고 이 편지를 태운 향을 마시며 잠에 드세요. 반드시 일곱 개의 옷을 준비해야 합니다. 넘쳐도, 부족해도 안 됩니다. 그가 당신을 잃어버린 것을 향해 인도해줄 것입니다.
Ross:(주술사의 장난 같은 편지. 어린애들이 장난 삼아 저주에 걸릴 거라며 무작위로 보낼 것만 같은 편지 내용에 잠시 편지를 버리려다,
...오늘 만났던 보시를 떠올린다. 안부를 궁금해하는 걸 의아해했던 보시. 무언가 할 말을 숨기고 있는 듯했던 보시. 그리고 그의 편지 속에서 잔인한 연인이었던 보시. 슬픔이 걷히자 의문만이 남았다.
왜 슬프지 않았지. 왜 원망스럽지 않았지. 이상한 일이다. 감정의 존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부재를 느끼는 것이. 허전해해야만 하는 일이.
어쩌면 이 편지가 답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로스는 옷방에서 옷장을 열어본다. 일곱개의 옷. 그에게 벗겨지지 못해 쓸쓸해하던 옷들이 걸려 있다. 하지만 그런 애상감 같은 건 없다. 남은 건 오직 갑작스럽게 생겨버린 감정의 공백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호기심뿐. 한 벌씩 입기 시작한다)
Ross:(옷을 입고 편지를 태운다. 그리고 천천히 잠에 든다. 공백에 파묻힌다.)
목걸이, 장갑, 신발, 모자, 외투, 겉옷, 속옷.
편지에 불을 붙이자 기이할 만큼 느린 속도로 타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빛이라곤 조금도 없이 온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커다란 갈색 망토를 몸에 두른, 열 살이 채 안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입니다.
Bosie:나는 문을 지켜. 여기서부터는 저승이거든. 들어가거나 나가지 못하게 지키는 거야. (발간 볼은 아이답게 동그랗고, 말하는 말투는 천진하다.)
Ross:(천진한 말투와 발간 볼 때문에 더욱 아이 같다. 그래서인지 저승의 문을 지킨다는 말이 조금 신경 쓰인다. 이곳이 저승문 앞이라는 사실보다도, 이 작은 아이가 문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더.) 너 혼자 이 문을 지키는 거니?
Bosie:(갸웃거린다.) 응. 나는 이 문을 지켜. 일곱 개의 문이 있는데 여기는 입구야. 근데 너는 누구야? 여기는 왜 온 거야?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가슴팍을 올려다본다.) 살아있잖아.
Ross:(그제야 아이에게 정신을 팔려 깜빡하고 있던, 자신이 저승 문 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이의 말에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군. 그렇다면, ) 아무래도 무언가가 죽었나봐. (웃는다.) 죽어버린 나의 무언가를... 찾으러 왔어.
아무래도 나의 일부가 죽은 모양이야, 내가 이 문을 지나갈 수 있게 도와주겠니? (친절하게 웃는다)
Bosie:그래? 죽었구나. 그럼 가장 안쪽에 있겠네. (웃는 얼굴도 말씨도 친절해 보인다. 눈 앞의 남자가 마음에 든 듯 자신도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냥은 안 돼. 문을 지나려면 대가를 지불하고, 내가 내는 시험을 통과해야 돼.
Ross:(어린 아이의 시험이라고 하니 영 귀엽게만 느껴진다. 절로 웃음이 새어나온다)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하니?
Bosie:몸에 걸치고 있는 것들. (이것저것 껴입고 온 당신을 올려다본다.) 그 목걸이 예쁘다. 나 줄래?
Ross:(괜히 장난을 쳐본다) 만약에 안주면... 영영 여기서 둘이 살아야 하나? (웃음)
(행여라 아이가 심통이 날까봐 이내 빠르게) 자, 여기 (목걸이를 건넨다)
Bosie:그러고 싶어? 네가 죽기 전까지 나랑 놀아도 돼. (선선히 목걸이를 받는다.) 싫으면 말고. (딱히 기쁘지도 서운하지도 않은 기색으로 목걸이를 받아 망토 안쪽에 넣는다.)
그럼 이제 시험이야. 나한테 지금 가장 하고 싶은 말을 해줘.
Ross:...홀로 저승문을 지키는 일이 너무 외롭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다가) ...보시.
Bosie:(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헤실거리며 웃는다.) 응. 이제 지나가도 돼. 안녕, ... ...근데 이름이 뭐야?
목걸이는 잘 간직해줄 거지? (문을 지나려다가) 그럼 즐거웠어. ( 인사를 끝으로 문을 나선다)
Bosie:로버트! 알았어. 안녕, 로버트. (가는 뒷모습에 손을 흔들어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버려진 마을 같은 광경이 보입니다.
: 이윽고
부서진 벽과, 벽에 달린
대리석 문이 보입니다.
굵은 글씨 조사 가능합니다!
벽을 빙 돌아 뒤쪽으로 가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문을 지나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을 듯합니다.
: 아무 장식도 없는 소박한 대리석 문입니다.
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에레쉬키갈의 희생제에는 반드시 제물이 필요하다
그녀가 가져간 것에 대한 무게를 지불해야 한다. 그것이 지하세계에서의 법이다
피 흘린 자는 돌려받을 것이고, 눈물 흘린 자는 거둘 것이다
문 옆에는 아까 아이가 입었던 것과 같은 갈색 망토를 뒤집어쓴 소년이 앉아 있습니다.
우리 또 만났네?
Bosie:날 알아? (제법 오만하게 대꾸한다. 성인과 아이의 경계에 있는 것 같은, 덜 자란 티가 나는 소년이다. 하지만 순순히 인사한다.) 안녕.
Ross:(어쭈? 그래봐야 어린애다) 글쎄, 좀 전에 만난 사람인(사람인가?) 줄 알았는데... . 넌 날 모르는구나.
그럼... 너는 여기서 뭘 하고 있니?
Bosie:여기 있다는 건 그 애도 봤다는 거겠지. (다른 사람을 칭하는 듯한 말투다.) 보면 몰라? 문을 지키고 있어. 너는 누군데?
Ross:나는 로버트 로스라고 해. 보시다시피 (크게 심호흡해서 가슴을 들썩인다) 살아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주변을 둘러보며 이곳이 저승임을 상기시킨다) 죽어버린 상태라, 죽어버린 나의 일부를 찾으러 왔어.
그럼 이번에도 문을 지나가야하는구나.
Bosie:로스, 로버트 로스... 아. (키득거리며 웃는다.) 네가 누군지 알겠어.
Ross:날... 알아? (저승에 온 이래로 가장 놀란다)
Bosie:아직은 몰라. 알게 되겠지. 그 앤, (허리춤 정도의 높이에서 손바닥을 흔든다. 그 정도 키를 표현하는 듯.) 아무것도 몰라. 아는 게 없지. 그게 좋은 건데.
어쨌든, 지나갈 거면 네 장갑을 줘.
Ross:....장갑을 주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건가?
Bosie:다른 게 좋겠어? 그럼 모자로 해.
Bosie:장갑은 싫고 이건 괜찮아? (키득거린다.) 저승의 여주인은 단호해. 대가 없이는 자비를 베풀지 않지.
Ross:이미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한데, 부디 그분이 내게도 그 자비를 베푸시면 좋겠네.
Bosie:그러길 바라. (올려다본다.) ...우린 나중에 만나게 되겠지. 아직은 모르지만. 이제 시험이야.
우리가 왜 이렇게 됐다고 생각해?
Ross:...(잠시 고민하다) 예술이 삶이 되고 삶이 예술이 되어서. (평온하게) 물론 나는 그 어떤 것도 되지 못했지만 말이야.
(잠시 후에 덧붙인다.) 외롭진 않았어?
Ross:...잊었어. 아주 오래됐거든. (이 질문을 한 의도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이 아이도 외로워서, 그래서 물어본건가, 생각한다) 외로울 땐... ....그 모자를 보면서 날 생각해도 좋아.
그럼 잘 지내. (문을 나선다)
Bosie:...(사라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아마도 들리지 않을 말을 중얼거린다.) 넌 좋은 사람이네. 원하는 걸 찾길 바라.
바람에 날린 모래들이 파도처럼 발등을 덮어옵니다.
재 같은 모래들만이 무너지고 쌓이기를 반복합니다.
익숙한 낯의 문지기도.
: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청동 문입니다. 큰 집의 대문만큼이나 커다랗네요.
문이 점점 커지는 것 같다면 기분탓은 아닐 겁니다.
아무 장식도 없는 문에는 조금 전 지나친 문처럼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대 산 자 되어 죽음의 여주인의 땅을 밟은 불경을 저지른 신발을 바쳐라
Ross:(신발?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본다. 이번엔 신발인가보군.) (익숙한 낯의 문지기에게 다가간다) 안녕. 나는 널 알아.
Bosie:(문 옆에, 망토를 뒤집어 쓴 채 주저앉아 있는 얼굴은 아주 익숙하다. 예민한 눈매와 다물린 입술. 비웃거나 경멸할 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모습을 당신은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아무 표정도 없이 당신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오랜만이죠. 말투가 제법 친근하네요, 로비.
Ross:(로비..? 기시감과 괴리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호칭이다) 보시, 네 말투도 제법 친근하네. 우리 오랜만인가? 좀 전에 본 것 같은데 말이야
Bosie:당신이 날 잘 알기라도 하는 양 친근하게 굴길래. 오랜만이잖아요. 젊은 날 보는 것도, 다시 만나는 것도. (날선 말투에서 다분히 적대감이 묻어난다.)
Ross:(왜 자신을 적대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주 어린 문지기, 보시의 모습을 지나쳐오며 보시에 대한 호감이 저도 모르게 쌓인 로스로서는 조금 당혹스럽다. 그리고
다시 만나는 것이라니. 이 문지기는 자신을 모른다고 했던 이전의 문지기들과는 다른 듯하다.) 오랜만이라니, 우리 언제 만난 적 있던가?
Bosie:(재미있다는 듯 쳐다보다 웃으며 일어난다.) 있다마다. 안 어울리게 왜 순진한 척이죠? (다가가 손을 잡고 손가락 사이로 느리게 제 손가락을 끼워넣는다.) 모르는 척하면 그도 모르는 척 다시 당신을 찾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닐 테고.
Ross:(당황하며 손가락을 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 얼어붙는다. 혼란스럽다.) 보시, 나는 그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난.... 그를 찾아내는 사람이지. (붙잡힌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엄지로 보시의 손등을 살살 훑는다) 그를 기다리나?
Bosie:내가? (코웃음치며 손등을 훑는 손가락을 내버려둔다.) 기다리기도 전에 찾아와주는 누가 있어서. 우린 서로를 기다리지 않아. 언제든 내가 그를 찾으면, 그는 내게 올 테니까. 내가 찾지 않아도. (말이 조금씩 빨라지는 것을 깨닫고 손을 떼어낸다. 한 걸음 물러나 미소짓는다.) 자, 이번에는 당신 신발을 줄 차례야.
Ross:(도려져나간 줄로만 알았던 감정이 아주 조금 짐작간다. 약간의 불쾌함, 약간의 우스움, 약간의 열패감. 이 재수없고 저항하지 못할 어린애에게 그런 걸 느꼈었을지도.)(지기 싫어 여유를 부리며)그가 네게 가려면 역시 그가 그의 자리에 있어야겠네. 그러려면 그를 찾아와야 하고, 역시나 그건 또 내 몫이 되겠지. (신발을 벗는다. 그리고 신발을 바닥에 떨어뜨려 주워 가라 하려다... 그냥 건넨다.) 자, 여기 신발.
Bosie:(같잖은 취급을 하고 싶어도 모멸감에 몸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신발을 채간다.) 그래, 잘 아네. 네가 그를 찾아오면 그는 내게 돌아오겠지. (신발을 내려다보다, 뭔가 생각난 듯 웃는다.) 시험은 이게 좋겠어.
키스해줘.
Ross:(당황한다. 보시와 키스를? ...잠시 주위를 둘러본다. 모래뿐인 사막. 맨발에 모래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진다. 분해서 몸을 바들거리는 보시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키스하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이곳에 남겠지. 물론 이 문지기는 키스를 해도 하지 않아도 영원히 이곳에 남을 것이다. 제게 적대감을 드러내던 이 문지기가 아니꼽다가도 사막에서 홀로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면 조금은 안타까워진다. 그가 네게 찾아올지 오지 못할지 알 수도 없는데.)
(결심한 듯 로스가 보시에게 다가선다. 여전히 바들거리는 몸. 진정하라는 듯 보시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을 끼워넣는다. 보시가 제게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입을 맞춘다. 메마른 입술을 조심스레 빨아들인다. 밀어내지 않는 이 사람이 어쩐지 안타까워져 조금 더 깊이 입 안으로 파고든다. 붙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보시의 뒷통수를 쓸어본다. 마치 그가 찾아온 것처럼.)
Bosie:(하, 하하. 말을 잃고 선 당신을 비웃어주려 했지만 다가오는 얼굴에 어째서인지 말을 잃어버린다. 다 안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감히 날 이해한다고 말하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알고 싶지 않다. 하지만 입술에 느리게 닿아오는 따뜻한 감촉에, 입이 벌어진다. 자신을 다 내맡기고 싶어진다. 정말 누구라도 괜찮았던 걸까. 그가 아니어도. 그런 생각이 든 순간 거칠게 당신을 밀어낸다.) 충분해. 됐어. 가. ...가.
Ross:정말 제멋대로구나, 당신은. (밀쳐진 채로 웃는다. 여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듯한 보시와는 달리 오히려 후련하다.) (문고리를 잡고 밀려다가 돌아본다) 매번 나만 시험을 치네. (짓궂게) 함께 갈까? (이건 로스가 보시에게 내는 시험이다)
Bosie:(혼란스러운 가운데 질문이 떨어진다. 이건, 이 말이야말로 비웃어줄만하다. 선심 쓰듯 굴지 말라고 쏘아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험을 치르는 건 너야. 네가, 그를 되찾는다면... 나도 그렇게 되겠지. 네가 포기하면 나도 평생 그를 추억할 수 없어.
(무슨 생각인지 모를 얼굴로 문 앞에 선 당신을 바라본다.) 가, 어서.
Ross:그래? 그럼 역시... 내가 그를 찾아야만 그가 너를 찾겠구나. ...갈게. 안녕. (떠난다)
Bosie:(미련없이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불어온 짠 바람이 머리칼을 흩트립니다.
뒤에 깊은 숲을 낀 길다란 해변가가 보입니다.
백사장은 작은 게나 조개껍질 하나 없이 기묘하게 깨끗합니다.
: 걷다 보면 무언가 조각된
강철 문이 보입니다.
: 로댕의 <지옥의 문>을 연상시키는 강철 문입니다.
크기는 조금 전 지나친 문보다 크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역시나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금실로 장식된 여왕의 머리칼도 서캐가 사는 거지의 머리칼도 무덤 속에서는 흙으로 돌아가나니.
Bosie:(문 옆에는 조금 더 나이든 모습의 더글라스가 수그려 앉아 있다. 고개를 들면 망토가 스륵 벗겨진다. 안색이 좋지 않은 얼굴이 침입자를 노려본다.)
Ross:(갈수록 날 탐탁치 않아하는군. ...이승에서의 시간과 상관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번에는 뭘 벗어주어야 하지?
Bosie:빨라서 좋네. 네 장갑을 주면 돼.
Ross:벌써 네번째야.(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픽 웃는다)
자, 여기. (장갑을 건넨다)
Bosie:(장갑을 받아 망토 안쪽에 넣는다.) 더 줘야지?
Ross:(조금은 비아냥 거리는 투로) 시험을 말하는 거라면, 답을 얻으려면 먼저 문제를 내야 할 텐데.
아니면, 이번에도 키스인가?
Bosie:하하! 이제야 좀 당신답네. 망자를 염할 때 머리카락을 남겨두는 걸 봤어? (휑한 손과 발, 그리고 머리를 가릴 모자 없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차례대로 눈에 담는다.) 이번엔 눈속임으로 넘길 수 없어 어쩌나. 가까이 와.
Ross:(조금 의심스럽다. 망자? 염? 이게 다 무슨 소리지? 하지만 문을 지나면서 깨달은 것 하나는... 이 공간에서는 문지기의 말은 절대적이라는 것이다.)(보시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자, 왔네.
이제 어쩔 생각이지/
Bosie:어쩌긴. (표정 없이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장난치다, 어느 틈에 싹둑, 한 움큼을 잘라간다. 언제 칼이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빠른 손짓으로. 아니 칼이 있긴 했던가?) 고마워요. 잘 받아가지.
Ross:이게... 무슨...! (잠시 생각한다. 보시의 말을 곱씹는다. 나는 살아있던 게 아니었던가. 죽어 가는 중이었나. 서서히... 이대로 망자가 되는 것인가)
(하지만 평정심을 유지하고) 그거면 되겠어? (보시의 손을 잡고 칼을 쥐고 있던 걸 확인한다) 손이.. 빠르군. (예쁘다는 말을 간신히 참았다)
Bosie:하하. (무표정하게 웃는 소리만 내며 손을 빼낸다.) 놀랐나보네. 하긴 이걸로 널 베었던 적도 있지. 걱정 마. 다시 베진 않을 테니.
Ross:(손을 베었던 시간이 떠오른다. 아프다. 고통스럽다. 괴롭다. 분노한다. 그리고... 슬프다.)
(문지기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보면 잊고 있던 감각이 자꾸 되살아난다. 그를 향했던 마음, 보시에게 가졌던 분노, 사건에서 감쪽같이 증발해버려서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감정. 비로소 제 경험처럼 느껴지는 기억들. 이게... 뭐지?)
네가 사람이라면 그러지 않는 게 당연하지. 아. 사람이 아닌가.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이 문을 지나가면 되겠군, 그렇지? (문이 열리고 ... 돌아보지도 않고 떠난다)
Bosie:왜 계속 가려는 거야? 끝까지 가봤자 기껏해야 그를 잃은 상태를 되찾을 뿐이잖아. 안 그래?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 평이한 어조로 말한다.)
Ross:한 번도... 한 번도 그를 갖거나.. 얻은 상태였던 적은 없어. 난 그냥 매번 그를
존재하게 하고 싶을 뿐이야. 그리고... (망설이다가) 내가 그를 찾아야 그가 널 찾아갈 테니까.
내가 포기하면 넌 평생 그를 추억할 수 없어.
(미련없이 떠난다.)
문지기는 정말로 더글라스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의 형상을 한 시험관에 불과할 수도 있죠.
그럼에도 그는 그와, 당신 인생의 이야기입니다.
이곳은 아까 전 지나왔던 고대 도시처럼 완전히 무너진 모습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이 잘 아는 어느 도시를 닮았네요.
건물들, 주택과 도로, 길가에 선 마차까지 모두 익숙한 모습인데 사람들만 없습니다. 저승이라서일까요?
: 안개로 흐릿한 길 끝에
개선문 같은 커다란 문이 보입니다.
: 완력으로는 열 수 없을법한 커다란 문입니다.
살펴보면 금강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 옆에 글씨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 어떠한 외투도 무덤의 추위에서 당신을 구해줄 수 없다
Ross:(이번엔 외투인가.) (문지기를 찾는다)
Bosie:(문 옆에 서 있던 중년의 남자가 가까이 다가온다. 40줄은 족히 넘었을 모습으로, 예민한 낯에 주름이 졌다. 하지만 익숙한 면모를 찾아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왔나요.
Ross:(자신의 얼굴을 만져본다. 함께 늙었나? 그건 아닌 듯하다.) (어쩐지 말을 놓기가 어렵다) 왔...습니다. 이번에도 대가와 시험인...가, .....요?
Bosie:(잘 깎인 조각상-조금 늙은- 같은 얼굴에 옅은 웃음이 인다.) 네가 날 어려워하는 걸 다 보고.
너는 젊구나. 젊고... 곧군.
Ross:....당신은 여전히 아름답고 매혹적인, 적, 적이군요. 큼큼.
Bosie:...하하! 하하하. 여전하다고? 그렇게 감추던 속내를 들었으니 기뻐야 할 텐데... 생각했던 것만큼 통쾌하진 않구나. 자. (손을 내민다.)
외투를 벗자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냉기가 훅 밀려듭니다.
이제 남은 옷은 두 겹뿐인데, 이대로라면 곧 그의 앞에서 전라가 되겠죠.
Bosie:(외투를 받아 팔에 건다.) 런던은 밤이 늘 추웠지. 여름에도.
Ross:그랬지.... (괜히 한 번 말을 놓아 본다) 함께 밤을 보낼 사람이 있으면 그나마 나았지만.
이제 또 시험에 들 차례인가요.
Bosie:나을 뿐인가. 그 품 밖의 세상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았어. 아... 네겐 듣기 좋은 말은 아니겠군. 어쩌겠어.
Ross:하지만 거기에 굴복당하기엔 ... 난 그가 아니니까.
Bosie:그래, 넌 요카난이지. (아주 오랜 희곡을 떠올리며 미소짓는다.)
이번 시험은 네게 쉬울지도 모르겠어.
내 목을 졸라. 죽지 않을 정도로만.
네가 원한다면 죽일 정도로 세게 졸라도 돼.
Ross:(어느 때보다도 가장 충격적인 시험이다. 심하게 동요한다. 목을 조르라고? 애초에 로스는 악행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가 살아 생전-나는 이미 죽은것인가-저지른 악행이라고는 ...남색. 그를 빼돌리려 한 것. 그를 사랑한 것. 그뿐.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한 적 없다.)
(보시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던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악한 적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죽도록 미웠던 순간이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보시가 죽는다고 해서 그가 제 것이 되지 못하리란 것도 알기에 빠르게 떨쳐낸 감정이다.)
(이 모든 건 이승에서의 기억과 감정. 비어있던 삶에 또 다시 살갗으로, 호흡으로 느꼈던 것들이 차오른다. 그리고 저승에서의 문지기들을 떠올린다. 마치 보시의 삶을 전부 함께하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 아니, 나는 도저히...)
Ross:나는 ... 사람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Bosie:대단한 인류애네. (감탄한 듯, 비꼬는 듯 조금 놀란다.) 네가 그런 부류인 줄은 몰랐어. 하긴, 이제껏 제대로 이야기 나눠본 적도 없으니.
Ross:(발끈해서는, 냉랭하게) 인류애라니. 그건 그냥 내 올바름을 위해서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야.
Bosie:멋진 대답이군. 올바름에 대한 신념이라니. 아, 정말로 감탄한 거야. (사실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돌아갈 거야?
Ross:(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돌아갈수가 있어?
Bosie:그럼. 네가 여기 어떻게 왔는지 떠올려봐. (자신보다 어려서 그런지, 한 번도 안 적 없는 그 속이 훤히 보이는 기분에 조금 신기해한다.) 네가 포기하면 오히려 우리 모두에게 좋을지도 모르지. 그토록 원했던 다 괜찮아지는 그날이 오게 될지도 몰라... ...그래. 어떻게 하겠어?
Ross:(포기라는 단어에 ... 보시, 문지기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린다. 돌아가고 싶은가? 춥다. 대가를 내주면 내줄수록 더 추워질 것이다.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죽음의 향기. 나는 죽어가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어도 이젠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이 저승에서 죽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도 나는 이 길을 갈 것인가.)
(어떻게 왔는지 떠올려 보라. 문을 다시 열어야 한다. 이곳은 다섯번째 문. 이제 걸치고 있는 것은 단 두 벌. ...돌아가기엔 세 벌이 모자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시. 문지기. 이제 그가 진짜로 보시였는지 아니었는지 의심하는 건 의미 없는 짓이다. 나는 그의 전생애를 관통해 지나가며 그를 ...하게 되었다. 내가 포기하면 영영 그는 혼자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채로)
Ross:당신은 이곳의 문지기라고 했어. 저승의 문지기가 목숨을 잃기도 하나?
Bosie:(오래, 아주 오래 고민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들려오는 물음에 슬쩍 미소짓는다.) 상냥하네.
선한 여행자에게 알려주지. 네가 맨 처음에 이곳에 발을 디딜 때. 어떻게 왔지?
Ross:옷을 입고, 편지를 태웠지. 그리고 잠에 들었어.
Bosie:그래...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바라본다.) 난 다 알려줬어.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Ross:한 가지만 묻지. 당신은 이 끝을 알고 있어? 나는... 그를 찾게 되나?
Bosie: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너는 그와 나에 대한 일에선 끌려다니기만 했지. 어울리지 않게도. (어깨를 으쓱인다.) 이젠 반대가 된 거야. 난 여길 지킬 뿐이니.
Ross:(여길 지킬 뿐이라는 말에 마음이 쓰인다. 손을 뻗어 이제는 주름이 조금 진 낯을 쓸어본다) 당신 목을 조르게 된다면, 그게 아주 조금은 당신을 위한 일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겠어? (어느샌가 말이 편해졌다. 이제 눈앞에 있는 건 40줄의 더글라스지만 동시에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어린 제멋대로의 귀족 청년이다.) 당신의 삶에 그가 있었다는 걸 ... 없었던 일로 하고 싶지 않아서라는 걸... 이해해 줄 수 있겠어? ...지금 나는 이제 벌어질 일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거야.
Bosie:(다정한 손길이 뺨에 닿는다. 아주 오랜만의 다정함이고, 사실 유쾌하고 괴상했던 어떤 작가가 아니고서야 받아볼 일이 없던 염려다.) ...나를 위해서라고. ...네가? 네가 왜?
아. (오래 전에 들었던 어떤 말을 떠올린다.) 외면하지 말라고 했었지. 그래.
Ross:(못 알아 들을 것을 알지만) 머리 빗는 인어와 춤추는 숲속의 작은 요정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그 인어와 요정도 사랑하게 되거든.
이야기를 해주던 그 남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이야기도 아주 오래 사랑했다고 말하면. ...조금 더 용서 받을 수 있을까.
Bosie:인어와 요정? (눈을 깜빡인다.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었지만, 부드럽게 염려하는 마음은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한 말을 하네. 네가 용서를 구할 필요는 없어. 나는 시험하고, 너는 시험에 들 뿐이야.
Ross:...그래, 그렇구나. (두 눈을 잠시 감는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천천히 눈을 뜨고 떨리는 손으로 보시의 목을 쥔다. ...그전에. 보시의 뺨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다정하게) 그저 시험일 뿐이야. (보시의 목을 죽지 않을 정도로만 조른다)
Bosie:(얼굴이 붉어지고, 끅, 허억, 소리를 내는 건 참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두 손은 반항하려는 기미도 없이 로스의 팔에 그저 얹혀만 있다. 뺨에 남은 온기를 생각하다 눈을 감는다. 이내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고 만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면, 거대한 금강석 문이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열려 있습니다.
Ross:(쓰러진 보시 앞에 주저 앉는다) 더글라스. 보시. 정신 차려봐.. (하지만 대답이 없고. 열린 문을 허망하게 바라본다. 저지르고 나니 더욱 혼란스럽다. 이게 정말로 누구를 위한 일이지. 다시 돌아가는 편이 낫지 않나. 그러나 포기하기에 로스의 집념과 고집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니다. 주저 앉았던 몸을 일으키는데,
...바닥에 눈물이 떨어졌다. 고여있는 줄도 몰랐던 눈물 방울이 바닥에 얼룩을 만든다. 그러나 마음을 굳게 먹고, 침을 삼키고 열린 틈으로 빠져나간다)
Bosie:(목에 붉은 울혈이 선명하다. 감은 눈은 뜨일 기미가 없다. 당신의 말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면 아무도 없을 것이고, 받아든 외투의 온기도 찬 공기에 다 식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눈을 뜨지 않았고, 알프레드는 뺨과 목에 닿았던 온기를 기억한다.)
이건 꿈일까요, 환상일까요, 실재하는 세계일까요.
드디어 살아 있는 것이 있구나 싶던 것도 잠시,
모든 식물이 종이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날카로운 하얀 들판이 지평선을 덮고 있습니다.
: 그리고 저 멀리 거대한 벽처럼 선 저것은...
문입니다.
한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높고 넓습니다.
Ross:(이젠 문이라기보단.. 벽처럼 느껴진다. 사실은 열리지 않고 열려서도 안 되는 벽을 억지로 뚫고 지나가는 것은 아닌가.) 문을 조사한다
: 너무 거대해 무슨 재질로 되어 있는지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
크기는 거의 궁전에 가깝고, 밀어봐도 열릴 것 같지 않습니다.
가까이 가보면 역시나 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알몸으로 와서 보자기에 감싸이고 수의에 싸여 어머니에게 돌아오니 몸에 걸친 모든 겉옷을 바치라
Bosie:(동시에 문 옆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든다. 피부는 확연히 얇아졌고, 곧았던 허리는 구부정해져 세월이 흐른 티가 확연하다. 하늘의 뜻을 알고 순종할 나이라고 하던가. 당신을 바라보는 눈길도 이전에 비해 확연히 우호적이다.) ...로스.
Ross:(몸도 정신도 이젠 모두 너덜하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될 만큼 인상이 달라졌다. 이 길의 끝을 보는 것의 의미가 있는지 의심하던 찰나 눈앞에 보시가 보인다.)
(세계가 기만으로 가득하다. 자신은 끊임없이 보시를 만나는데 연속되는 자신의 시간선에 끼어드는 이 사람은 정작 좀 전에 만난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은 분하다. 그러니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사람의 목을 조르고 괴로워했는데, ...또 다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앞에 나타나 문지기로 서있다.)
이번에도 겉옷인가.
(겉옷을 벗어 건넨다) 이젠 정말로 ... 전라가 될 일만 남았군. (낡고 지친 목소리로) 계속해서 궁금하던 게 있어. 더글라스 알프레드. 당신은 누구지?
Bosie: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의 셔츠와 바지를 건네받는다.) 사람은 원래 옷 없이 이 세상에 오지.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어... 내가 누구냐고?
네가 이미 대답한 듯한데. (미소짓는다. 날카롭지도, 경멸의 뜻도 없는 부드러운 미소다. 그를 이루던 모든 것이 세월에 깎여 마모되었고, 이제는 긴 삶에 대한 체념과 지친 마음만 남아 있는 것 같다. 와일드를 만났어도, 만나지 않았어도 이 정도의 나이가 되면 아마도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Ross:우리는 함께 늙어버린 것 같군, 안 그래? ...어쩌면 나는 이런 당신의 모습을 평생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군. 날 이번에도 시험에 들게 할 생각인가? (두렵다. 좀 전엔 목을 조르라고 했다. 이번엔 무슨 시험일지 고통스럽다. 그를 ....죽여야 하나)
Bosie:꿰뚫어보는 화법은 여전하네. ...아마 그럴 거야. 네겐 아쉬운 일이겠지만 나는 꽤 오래 살거든. 이 이야긴 여기까지 하고, 그래. (품 안에서 단도를 꺼내 건넨다.)
이 칼로 내 심장을 찔러. 땅에 피가 스미도록.
Ross:(예상은 했지만, 화가 나서) 꼭 그렇게까지 해야해? ...피를 바쳐야 하는 거야? 그래? (단도를 쥐고 있는 보시의 손을 잡아 끈다. 그리고 보시의 손을 쥔 채로 단도를 제 정맥에 갖다 댄다)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나는 여기서 피를 바치고 네가 그를 찾아가, 보시. 분명 그가 기뻐할 거야.
Bosie:기껍다면 시험이 아니지. 괜히 네 몸에 상처를 내진 말라고. (칼을 쥔 손을 빼내려 힘을 준다.) 그를 찾아 어디로 갈까. 무덤가엔 갈 수 있겠지... 나는 이곳을 지킬 뿐이야.
Ross:(막아뒀던 분노가 터져 나온다. 모든 게 돌아왔다.) 너 아무렇지 않게 내 몸에 상처를 냈었잖아! 아무렇지 않게 그를 굴복시켰잖아! 매번 기껍게 그의 시험에 들고 그를 시험에 들게 했잖아! (굵은 비명을 지른다) 고통스러워. 모든 걸 잊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또 다시 모든 감각을 되찾아와. 이제
오스카 와일드의 환심같은 거 없어도 괜찮다고 그의 사랑 같은 걸 다 잊고 지냈었는데 그의 사랑이 어땠는지 너를 사랑하는 그를 보면서 다시 전부 떠올렸어.
그래놓고는 어떻게 이제 와서 그런 늙어버린 얼굴을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아니 모든 걸 다 알아버린 사람인 것처럼 굴어!
(보시의 손으로 제 팔을 긋는다. 하지만 보시가 힘을 주는 바람에 깊이 긋지는 못하고 길게 살이 찢어지는 정도다.)
Ross:(이성을 잃은 로스가 견디지 못하고 단도를 뺏어든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휘두른다. 보시는 몸을 피하지도 않고 칼부림을 온몸으로 맞는다. 그 모습에 더욱 격분해 심장을 찌른다.)
보, 보시..... (당황해서 심장을 찌른 손이 부들부들떨린다) 보시.. 보시...
(자신의 것인지 보시의 것인지 모르게 피가 땅에 스민다) 보시... 이.. 이러려던 게 아니야.. 잠깐만... (호흡이 가빠지고 자신답지 않게 잃었던 이성이 돌아온다) 내가.. 내가 왜... 보시 괜찮은 거지, 괜찮은 거 맞지
(이 시험의 진의는 문지기의 심장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것이었던가)
Bosie:하, 하하... (입을 열면 울컥 피가 쏟아져 나온다. 입가를 닦으려다 손날에 핏자국만 번지는 것을 깨닫고 내버려둔다.) 훌륭, 한데... ... 그때 했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 해. (마치 자신이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당황하는 네가 이해되지 않는다. 새삼스러운 일이다. 너를 이해한 적이 있던가. 눈엣가시 같은 사내였다. 그의 옆에 붙어 있는 것을 보면 몸서리치게 거슬렸다. 고작 그의 작품에 대한 권리를 가진 걸로 그를 가진 것마냥 구는 태도가 고까웠다. 어차피 그는 자신의 것인데. 그래야 할진대. 그러나 그가 토해내는 절규 같은 말들이 가슴에 박힌다. 절규가 뚫고 지나간 가슴에서 피가 샘솟는다. 그에게서 자신을 본다.) 하핫, 하. 하하... ...
(어쩔 줄 몰라하는 그에게서 묘한 만족감을 느껴버리고 마는 것은 목말라 있기 때문인가, 일곱 겹의 옷을 벗으며 자신을 유혹하는 살로메를 바라보는 왕의 기꺼움인가, 서글픔인가.) ...로스, 손을...
Ross:(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깨가 들썩인다. 손? 피로 범벅이다. 옷에 닦으려 하지만 셔츠도 바지도 없어 그저 맨살에 피를 더 묻히는 꼴이 된다. 흐느낀다. 겨우 닦아낸 손을 보시에게 건넨다)
(온몸이.. 피범벅이다)
Bosie:(손을 끌어 손바닥에 푹 꺼진 뺨을 기댄다. 나이든 모습이지만, 눈 감은 채 손바닥에 얼굴을 누인 모습은 자라지 못한 그 청년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 ... ...
어느새 들판은 붉게 물들어 흔들리고 있습니다.
문은 온당한 여행자에게 스스로 길을 열어줍니다.
Ross:(이젠 저 길을 가도, 그가 돌아와도 적어도 자신은 결코 행복해지지 못할 것을 불현듯 깨닫는다. 하지만 ... 이미 걸어온 길을 돌아가지 못한다. 이제는 고집으로 집념으로 문을 나선다)
Bosie:(저승에 있는 것이 또 다시 죽을 리도 없지만, 노인은 눈을 감고 일어나지 않는다. 손바닥에 닿는 온도는 여전히 미지근할 것이다.)
채찍이라도 맞은 듯 피범벅이 된 몸으로 문을 넘어갑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백야가 당신을 맞이합니다.
어둠도, 그림자도 없이 오직 하얀 공간만이 펼쳐져 있습니다.
아니, 저 너머에 땅과 하늘을 관통한 가느다란 선이 보입니다.
Ross:(지친 걸음걸이로 선을 향해 간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은 무無로 돌아간다. 그러니 경배하라, 강대한 에레쉬키갈라!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당신이 기억하는 바로 그 얼굴이다. 파티장에서 보았던.)
Bosie:흔히 볼 수 있는 광경도 아니죠. (위아래로 훑어보다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Ross:(조금 수치스럽다) 누군간 종종 봤던 광경이지.
Bosie:이... 걸? 피로 목욕하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Ross:아... (그제야 정신이 좀 든다) 피. (.....다시금 문앞에서 심장을 찔린 보시의 얼굴이 떠올라 괴롭다)
좀 씻고 싶군. 돌아가면 제일 먼저 씻는 것부터 하고 싶어. 정말이지... 정말로 갓태어난 어린애가 되는 기분이야. 전라에 피범벅이라니. 갓 태어날 때를 빼고 이런 행색을 하는 경험을 해보긴 정말 쉽지 않은데.... (이성이 조금 망가져 되는 대로 떠들었다. 그 생각에) ..내가 잠시 아무 소리나 막한 것 같군 안 그래? (마른세수를 한다)
그래 여기까지 왔으니... 또 옷을 내어주어야 하나.
하지만 이제 내게는 남은 옷이 없는데. (내려다 본다) .......정말로 이것까지?
Bosie:그렇게 말하니 신생아랑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하하!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요? 종종 보여줬던 모습이라며.
Ross:(잠시 숨을 고른다) 후우....... 이미 온 몸에 피가 묻었는데 나체쯤이야. (사실은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이제 이건 보여줄 생각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야, 보시. (속옷을 벗는다) 이제는 그만 그를 보고 싶어. (그가 너와 함께 행복해하는 모습을.) (속옷을 건넨다)
Bosie:(받아든다.) 나도 그래. 그럴 수 있길 늘 바랐지.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 생각했어. 무릎을 꿇을까, 그 손에 얼굴을 묻을까, 입을 맞출까, 용서를 구할까, 사랑한다는 말을 할까. ...너는 어떻지? 이건 그냥 물어보는 거야.
Ross:(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그의 생각만으로 은은하게 얼굴에 웃음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Ross:그의 존재로 충분해 바라는 건 없어 그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는 대로 하고 싶을 따름이야
Bosie:...욕심나지 않아? 어떻게 그럴 수 있지?
Ross:욕심을 내서 내 것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그렇게 했겠지만.... 나는 작가가 아니라서 이야기 속 인물들을 마음대로 하지 못해. 작가는 ... 그 사람이지, 내 몫이 아니야.
Bosie:네 상상 속에서도 네 말을 안 듣나 보네. 속 썩이는 인물이겠어. (남 일처럼 말하다 어쩐지 우스워져 푸핫 웃는다.) 내가 할 말은 아닌가.
Ross:...그래, 네가 할말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시험은 어떤 거야? 이번엔 동반 자살이라도 하나.
Bosie:(네가 말하니 짜증난다.) 아, 그러셔.
Bosie:이 문으로 들어가는 값은 됐어. 네게 받은 마지막 옷이 있으니. (속옷을 흔들어보이며 다시 상기시켜줄까 하다 관둔다.) 다만 저승의 것을 다시 가지고 가는 데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해.
규칙대로라면 네 육신을 바쳐야 하지만...
그것을 대신할 정도로 네게 정말 소중한 것.
저울에 올렸을 때 여주인이 만족할만한 것을 줘.
Ross:(어이없어서 웃는다) 내 육신보다 소중한 걸 찾으러 왔다가 내 육신을 대신할 정도로 소중해진 걸 내 손으로 죽여도 봤어. 이제 나한테 내 육신을 대신할 정도로 소중한 건 ......... 내 눈과 귀와 목소리를 줄게. 그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나누었던. 눈과 귀와 목소리. 그거면 될까.
Bosie: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좋아. ...더 하고 싶은 말은 없어? 마지막 말이 될 텐데.
Ross:.....아무것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거야. (그에게 그러고 싶어했던 것처럼. 똑같이. 오히려 이 긴 여정이 끝나 후련하다는 듯이 힘없이 웃는다) 마지막 말은 끝났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게 내 마지막 말이야. 그가 봤다면 재밌는 아이러니라고 해줬을지도 모르겠네. 자. 이제 난 뭘 하면 되지.
Bosie:... ...(무엇이 그리 후련한지 미소짓는 얼굴을 응시하다 손을 내민다.) 잡아. 내가 함께 갈 거야.
그리고 세상을 볼 눈과, 목소리, 소리들이 멀어집니다.
결코 살아돌아오진 않을 무언가를 돌려받기 위해.
당신은 더글라스의 인도에 따라 어둠 속을 걷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지금, 그가 유일한 길잡이입니다.
이내 이끌던 손이 다른 한 손을 잡아 끌어 어딘가에 내려놓습니다.
Bosie:제단이야. 여기에서 많은 것들이 태워지고 바쳐졌지.
(보시의 손을 잡아 끌어 그의 손바닥 위에 글씨를 쓴다. '여기에 또 무언가를 바쳐야 하나?')
Bosie:아, (들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문다. 제단 위에 올려진 것을 집어들어 당신 손에 얹어준다.)
Bosie:(시든 해바라기. 만지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해바라기를 손에 들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던 머릿속이 밝아집니다.
그의 옆에 선 한 사내. 그를 지켜보며 느꼈던 것들.
당신에겐 다행스러운 일일까요, 옆에 있는 사내도 그것들을 전부 돌려받았을테죠.
Ross:(초점을 잃은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압축된 감정이 순식간에 자신을 관통한다. ... 온기가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손을 뻗어본다. 보시인가.)
Bosie:(밀려오는 기억에 숨이 버거워 크게 들이쉬다 뻗은 손을 잡는다. 동질감인지, 연민해서인지. 다른 손을 천천히 뻗어 눈물을 닦아준다. 그리고 들리지 않겠지만,) 로스.
Ross:(눈물을 닦아주는 손의 촉감이 느껴진다. 손을 잡고 얼굴에 부빈다. 아. 예쁘다고 말해주지 못했던 그 손이다. 영영 말해주지 못하게 되었군.)
Bosie:(눈물 흘리는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낀다. 볼품없게 잘려나간 머리카락이나 피가 굳은 뺨 같은 것들을 쓸어주다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댄다. 무어라 중얼거린다.)
그 말을 남기고, 뺨에 닿았던 온기가 멀어집니다.
더글라스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지만 당신은 볼 수 없겠죠.
강한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당신은 깨어납니다.
껴입었던 옷들은 온데간데 없이 나신인 모습입니다.
입을 열어 보면 약간 잠겨 낮아진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당신은 잃어버린 바로 그것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깨어나기 전 더글라스 경이 무언가 말하려 했던 것도.
꿈속에서 바쳤던 것들은 모두 돌려받았습니다. 당신이 잃어버린 그것 또한.
더글라스 경도 꿈속에서 겪었던 일들을 기억합니다.